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글 전 한국어 표기 (문단 편집) == 그 외 == 이두와 향찰, 구결과는 별개로 [[발해]]에도 독자적인 문자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발해 유적지에서 한자와 비슷하지만 좀 다른 모습의 문자가 새겨진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고, [[이태백]]이 다른 관료들은 해독할 수 없었던 [[발해]] 국서를 해독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후의 요나라와 금나라 역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썼던 것을 보면 발해의 독자 문자가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할 것이나, 발해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나 출토된 문서 자료가 적어서 연구가 미진한 상태다. 다만 대체적으로는 한자와 완전히 다른 문자를 만든 것까지는 아니고, [[거란 문자]], [[서하 문자]], [[여진 문자]]처럼 한자를 변형한 문자이거나, [[쯔놈]]이나 구결과 비슷한 형태였으리라고 추정된다. 보통 한글 이전에 사용된 문자로 [[한자]]와 그 변형 문자들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불교]] 유입과 함께 들어온 범자(실담문자)[* 인도계 문자를 의미한다.]도 한반도에 유입되고 사용되었다.[* 단순히 장식용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불교 밀교 전통에서는 특정한 [[진언]]이나 [[다라니]]를 범자로 기록하고 소리내 읽고 하는 식으로 사용된다.] 이미 신라시대 유물에서 범자가 발견되고 있으며 고려, 조선[* 조선 세종 시기 일본이 [[팔만대장경]] 경판을 요청했으나 세종이 이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대중들에게도 유명하다. 그러나 당시 팔만대장경을 내주지 않았을 뿐 대신 대장경 1부, 금자 화엄경 1부, 주화엄경판, '''밀교대장경 경판'''을 일본에 내려주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이는 일본으로 건너가 쿄토의 한 절에 보관되는데, 고작 1년만에 절에 불이 나 소실된다. 이 '밀교대장경 경판'엔 '범자'가 사용되었다. 즉 고려시대에 이미 범자가 적용된 경판으로 불경을 찍어내고 있었고, 이 경판이 조선 초까지도 보관되어 있었으며, 이를 국왕까지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범자에 대한 지식과 활용이 꽤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고 상식화되어있었음을 시사한다.]에 이르기까지 불교 유물에서 범자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옛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말레이시아의 경우와 같이 범자를 이용하거나 개량해서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체계는 따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술에 따르면 일부 고승들이 우리말 표기에 범자를 사용했다고 하나 물적 증거는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밀교세가 강하고 불교연구가 활발한 일본과는 다르게, 한국은 조선시대에 불교탄압을 거쳤고 현대에도 불교를 포함한 인도계 문화 연구가 중국문화나 서구문화 연구에 비해 관심을 덜 받는 관계로 범자 사용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비주류이자 초입단계에 불과한 상황이다. [[일본]]에는 [[만요가나]](万葉仮名)라는 비슷한 한자어 용법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